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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사년 고종의 대응 (정치적 고립, 외교전략, 내부 저항)

by 별바라기 2025. 3.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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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사늑약 당시의 모습을 상상해서 그린 그림


1905년 을사년은 대한제국의 운명을 가른 해였습니다. 일제는 러일전쟁 승리를 계기로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강탈하려 했고, 그 결과 ‘을사늑약’이 체결되었습니다. 많은 국민은 을사오적을 비난하지만, 그 중심에는 대한제국의 황제였던 고종이 있습니다.
그는 이 위기 상황에서 어떤 선택을 했고, 어떻게 대응했을까요? 이 글에서는 고종의 외교 전략과 국제 정세 속 정치적 고립, 그리고 내부 저항을 중심으로 ‘을사년 고종의 대응’을 집중 분석합니다.

 

정치적 고립 속의 고종 황제 (세계 정세와 대한제국의 위치)

 

1905년 당시 대한제국은 러일전쟁이라는 거대한 국제전의 한가운데에 있었습니다.
일본은 러시아와의 전쟁에서 승기를 잡고, 동북아시아에서 우위를 차지하려 했으며, 그 중심에 조선(대한제국)이 있었습니다.
러시아와 일본 모두 조선을 차지하려는 야욕이 있었고, 대한제국은 그 사이에서 외교적으로 매우 고립된 상태였습니다.

고종은 열강을 이용해 일본의 침략을 막아보려 했습니다. 미국, 러시아, 프랑스, 영국 등에게 외교적 도움을 요청했지만, 실상은 일본이 이미 영국과 '영일동맹'을 맺고, 미국과는 **'가쓰라-태프트 밀약'**을 통해 조선을 일본의 영향권으로 인정받은 상황이었습니다.
고종은 이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채 외교로 일본을 견제하려 했지만, 열강들은 이미 조선에 큰 관심이 없었습니다.

결국 고종은 점점 국제적으로 고립된 상황에서 을사늑약이라는 외교적 위기를 맞이하게 되었고, 믿을 수 있는 외교 파트너도, 강력한 군사력도 없는 상태에서 버틸 수 있는 여지가 점점 줄어들게 됩니다.

 

외교 전략과 비공식 저항 (고종의 밀사 외교)

 

을사늑약이 체결된 후, 고종은 공식적으로 조약에 서명하지 않았습니다. 이는 매우 중요한 의미입니다. 고종은 끝까지 을사늑약의 정당성을 인정하지 않았고, 국제사회에 이 조약이 무효임을 알리려는 외교 전략을 시도합니다.

그 대표적인 사건이 바로 1907년 헤이그 특사 파견입니다.
고종은 이준, 이상설, 이위종 세 사람을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열리는 제2차 만국평화회의에 밀사로 파견해, 일본이 불법적으로 조선을 보호국화했다는 사실을 세계에 알리려 했습니다.
하지만 일본은 이미 국제사회와 교감을 통해 조선을 자국 영향권으로 인정받았기 때문에, 이 특사는 공식적인 외교적 성과를 얻는 데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고종의 외교 전략은 국제적 공감대를 얻지는 못했지만, 국민들에게는 항일 의지를 보여준 상징적인 행동이었습니다. 고종은 이후에도 프랑스, 독일 등에 밀서를 보내며 을사늑약의 부당함을 호소했습니다.

 

내부 저항과 제한된 권한 (을사오적과 황제의 딜레마)

 

을사늑약이 체결될 당시, 일본은 조선 황실을 군사적으로 위협하고 있었습니다.
1905년 11월 17일, 중명전에서 을사늑약이 체결되었을 때, 고종은 해당 회의에 참석하지 않았으며, 조약에 서명하지도 않았습니다.
하지만 일본은 군대를 배치하고, 당시 고위 대신들을 회유 또는 협박하여 조약 서명을 강행했습니다.
고종은 조약에 대한 거부 의사를 분명히 밝혔지만, 황제의 명령이 먹히지 않는 상황에서, 현실적으로 이를 막을 수 있는 힘이 없었습니다.

조약 체결 이후, 고종은 조약 무효 선언문을 국내외에 발표하고, 황제 권한을 사용해 을사오적을 탄핵하려 했지만, 일본은 통감부를 설치하고 점점 더 황제의 권한을 제한했습니다.
황제는 더 이상 나라의 주권자가 아닌, 형식적인 존재로 전락해 가고 있었던 것이죠.

당시 민중들 사이에서는 자발적인 의병 운동이 시작되었고, 황제의 침묵에 대한 비판도 존재했습니다. 그러나 고종은 그 한가운데서 무력함과 좌절 속에서도 끈질기게 항일 외교를 시도한 군주였습니다.

 

결론 :  고종은 무능했을까, 고립된 투사였을까?

 

을사년 고종의 대응은 다양한 해석을 낳습니다. 어떤 사람은 그를 무능한 군주라고 하고, 또 어떤 사람은 국제 외교에 뛰어들어 항일의 뜻을 꺾지 않은 외로운 투사라고 말합니다.
분명한 것은, 그는 조약 서명을 거부했고, 늦게나마 세계에 조선의 억울함을 알리기 위해 노력했다는 점입니다.

고종은 당시 강대국 사이에서 외교적으로 고립된 나라의 지도자였습니다. 자주적인 외교력을 키우지 못한 조선의 구조적 한계, 그리고 내부 권력자들의 배신 속에서 그는 최선을 다했지만 역부족이었습니다.

을사늑약의 비극은 고종 개인의 실패라기보다는, 무너진 조선의 체제와 외세 의존적인 외교 전략의 결과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고종의 저항은, 이후 의병 운동과 독립운동의 불씨가 되었고, 우리는 그로부터 나라를 지키기 위한 외교와 단결의 중요성을 다시금 배우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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